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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꼬마가 부른 랩이 요즘 메가히트다. 바로 차노을의 HAPPY다. 그 나이에 맞는 순수함으로 쓰여진 가사. 그리고 씩씩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나도 듣다보면, 괜스래 마음이 울컥하다.
이 랩은 차노을 학생의 "장래희망"이란 학교숙제 덕분에 만들어졌다. 차노을군의 아버지께서, 장래희망을 물어봤고 자신의 교육관을 녹여서 만든 노래가 이 아름다운 가사다.
ADHD가 있는 아들이 친구들과 잘 사궜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여진 가사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학급의 인기남을 넘어, 전국 인싸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러한 Happy의 가사에 왜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는 걸까?
차노을 HAPPY, 우리는 왜 이토록 단순한 가사에 감동받을까?
1. 꿈을 꾸는 능력
나도 어느덧 30대 초반이 되었다. 청년이라 불리는 나이지만, 내 정신상태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잊고 사는 것이 있다. 바로 "꿈을 꾸는 능력"이다. 물론 변명은 있다. 매일 똑같은 일과에 치여 살아간다. 일과 중엔 집중하느라 틈이 없다. 일이 끝나면 정신과 체력 모두 방전되어있다.
나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지 않은가? 차노을 HAPPY에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꿈꾸는 능력"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갖고 있는 능력이다. 우리 역시 그랬다. TV에는 만화 주인공을 따라하기도 하며, 많은 장래희망을 가지곤 했다.
나는 20대를 참 힘겹게 보냈다. 공황장애, 우울증, 번 아웃 기타등등. 내 인생은 불행했다. 그렇기에 나는 "행복"을 찾아헤맸다. "내적평화"를 원했다. 그 결과 지금은 "나만의 행복"을 찾은 듯하다. 모든 행복은 내 안에 있었다. 인간은 꿈을 이뤘을 때보다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 성과보다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성취에서 끝나면, 이내 권태감이 밀려온다.
왜 나는 목표를 달성하고도 행복하지 않은가? 만족하지 못하는가? 참 많은 공부를 해봤다. 오히려 목표를 달성해도 이전보다 불행했기 때문이다. 결과만 말하자면, 인간은 그렇게 설계가 되어있었다. 이는 항상성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성취 후에 몰려오는 행복감. 이렇듯 과도한 호르몬이 지속되면, 인간의 몸은 망가져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뇌는 호르몬 수치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린다. 쉽게 비유하자면, 우리의 몸이 항상 같은 체온을 유지하려는 것과 같다.
참으로 애달프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꿈을 꾸고 좇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그러므로 계속 꿈을 꿔야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생기가 넘쳐보인다. 행복해보인다.
차노을 HAPPY 가사는 이렇듯 우리가 잃었던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괜스래 많은 사람들이 울컥하고 감동을 받는 듯한다.
TIP: 행복에 있어서는 하루가 중요합니다. 성취감보다는 뿌듯함에 집중해보세요. 원하는 것이 없는 것을 원망하기 보다, 가진 것에 감사하세요. 이는 타인에게 맞춰진 인생의 초점을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이는 미래나 과거에 있던 초점을 현재로 옮기는 데 많은 도움을 집니다.
2. 삶에 대한 통제력
삶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우울해진다. 하지만 차노을 HAPPY 가사에는 선택권이 많다. 뭐가 됐든 행복하면 됐지. 뭐가 됐든 행복하게 살래. 반복되는 노래 가사에는 "인생의 선택은 내가 하겠다."는 함의가 있다. 선택은 곧 "삶의 통제력"이다.
어렸을 적 생각과 달리, 나이가 들수록 선택의 폭이 좁아지더라. 책임감이 많아지기 때문이였다. 나의 한계를 깨닫는 경험역시 쌓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 가끔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 도저히 무엇을 해야할 지 막막할 때가 있다. 이 때야말로 진정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답답한 늪을 벗어나는 방법을 안다. 바로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다. 주변을 정리하는 것은 청소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나쁜 습관등을 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함께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삶의 통제력이 회복된다. 이는 다시 삶에 활력을 제공한다. 역설적으로 금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게 된다.
3.존중
차노을 아버지의 피처링은 노을이에 대한 존중으로 가득하다. 차노을 아버지, 이 분 직업을 듣고 솔직히 많이 놀랐다. 목사님이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가사는 불교적 색체가 강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것이 인생이다. 네 행복은 네가 선택하는 것이다.
나 역시 교회를 다닌다. 하지만 내가 본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삶의 정답은 있다. 고민과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런 설교도 참 많이 들었다. 정말 그럴까? 글쎄. 나는 못 믿겠다. 적어도 내 인생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나를 다시 교회에 다니게 만든 건, "조던 피터슨"이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였던, 그의 성경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인 그의 창세기 해석은 놀랍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뱀을 풀어놓은 이유는 인간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조차 "혼돈"은 통제할 수 없었다는 해석이다.
카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재물을 바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만 예뻐하신다. 특별한 이유도 없다. 재물의 양이 많았다던지. 재물의 질이 좋았다던지. 납득가는 이유 말이다. 그래서 결국 카인은 흑화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왜 카인을 흑화하도록 만들었을까? 이는 노력이 반드시 보상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인생이다. 임상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의 이러한 해석은 불교의 색채에 가깝다. 하지만 그 역시 신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래서 놀라웠다.
존중이란 가치는 겸손함에서 나온다. 내가 정답을 알고 있다고 느끼면 오만해진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간섭하려 든다. 우리나라는 특히 이것이 심하다. 인생의 정도(正道)를 정해놓고, 그를 벗어나는 사람을 마구 비난한다. 낙오자라고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1분 뒤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아는가? 지금 내가 앉아있는 건물에, 갑자기 급발진 한 승용차가 달려들 수도 있다. 이런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저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사회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정답 아닌 정답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존중이 부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HAPPY 가사에 위로를 받는 것이다.
결론
차노을 HAPPY 가사는 9살 어린이의 시각에서 쓰인 단순한 가사다. 하지만 HAPPY라는 가사처럼, 행복에 있어 많은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 우리는 꿈을 꾸고 꿈을 좇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온전히 내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본능은 어른이 되면서 깊은 잠에 빠져있다. 그래서 살 수록 인생이 재미가 없는 게 아닐까? 차노을 HAPPY는 이러한 우리의 인생에 훌륭한 각성제다. 고마워 노을아. 감사합니다 목사님.